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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책리뷰

[소크라테스의 변명] 내용 요약 및 개인적 감상

by ISA(류) 2021. 12. 2.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16274566 

 

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가 죽고 철학이 살다플라톤 철학의 출발점 『소크라테스의 변명』서양 철학이 플라톤 대화편의 주석이라면, 플라톤 대화편은 『변명』의 주석플라톤의 대화편들 가운데 가장 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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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이해라는 과목의 기말 과제로 작성한 내용이다.

 

1.    내용 요약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회부된 이후 재판에서 한 발언들에 플라톤의 정리를 작가 나름의 시각을 더해서 풀어낸 책이다. 서양 철학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담겨있다. 작품 내용은 크게 3 단락으로 나뉘는데 유무죄에 관한 항변 연설과, 대안 형량 제안 연설, 그리고 최종 판결 후 배심원들을 향한 마지막 연설로 이루어져 있다. 위기가 와야 그 사람의 본모습이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의 본연의 모습을 단편적이지만 진솔하게 보여줄 수 있는 연설 내용들이다.

첫 번째 연설에서는 흔히 말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지적 허영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해당 재판 자체가 불합리함을 주장했다. 각 계층별 모든 사람들 중 다른 사람들에게 저명하고 지혜롭다고 인식되는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의 지혜 앞에서는 실로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까발려지는 내용과 그것으로 인해서 앙심을 품은 소송인 들의 얄팍함과 그들의 주장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한다. 그 후 자신이 믿는 진리에 의해서 재판에 유리한 방식으로 호소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보편적으로 나쁘다고 알려진 죽음에 대해서 진실로 아는 자가 없고 스스로도 모르기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기에 그러지 않겠다는 내용이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이 스스로의 진리에 맞지 않기에 그러지 않겠다. 는 태도를 확실히 해서 보여준다.

유죄 투표가 완료된 직후인 두번째 연설 내용은 자신이 고수 해온 검토하는 삶의 태도를 끝까지 유지할 것이며, 다른 형벌을 받기 위해서 거짓말을 할 생각도 없고 자신은 오직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고 사욕을 위해서 검토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서 대범하게 역으로 자신이 받아야 할 형량으로 중앙 시청에서의 식사대접(사실상 상)을 주장했다.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스스로가 믿는 삶의 태도를 지키고 소송한 자들이 원했을 사악(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의하면)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과 금전적인 부분에 초탈 한 부분을 벌금과 추방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들어내 보인다.

사형이 확정 된 직후의 세 번째 연설에서 역시 고발자들의 어리석음을 검토해서 보이고, 그 자신의 삶의 태도를 그대로 고수해 보인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추론에 의한 예언을 통해서 그의 사후 일어날 일들을 예언했다. 여기서 유명한 구절인 “아니, 벌써 떠날 시간이 되었군요. 나는 죽으러, 여러분은 살러 갈 시간이,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분명치 않습니다.”라는 인상적인 말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마무리된다.

 

 

2.    감상

 

개인적으로 소크라테스라는 키워드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의 삶의 태도와 사상이 나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으면서도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늘 나에게서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항상 진리라는 것 그리고 남들이 말하는 진리 라는 것을 검토하는 삶을 자연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그에 대해서 깊이 이해한다고 착각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내가 그것을 깊이 이해했다. 한들 소크라테스이자 나 자신이 아닌 이상 그것을 진실되게 맞다고 할 수 있을까?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말에 의하면 신(전지전능) 만이 아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그의 생각과 다르게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믿고 자신의 앎을 믿는다. 내가 그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부분에 대한 앎과 스스로의 한계와 무지에 대한 앎이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이다. 수많은 탐색 끝에 세상에 기댈 곳 없이 스스로를 의지하면서 스스로 걷기로 결심한 내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태도가 오히려 신기하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진리가 있지만 그중 진실로 항상 바르고 따라야 할 삶의 태도(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은 그 상황에 맞게 변하고 그 사람에 맞게 변한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다.

 

접할 수 있는 모든 진리를 살피고 검토하고 따르고 추종해보아도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명확한 라는 걸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호흡수련을 하면서 주천을 하고, 양신이라는 유체이탈 같은 경험을 하고, 참선을 통해서 돈오와 삼매를 경험해도, 묵상을 통해서 성령이 임한다는 현상을 경험해도 그것이 진정 나에게 진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경전을 읽고 그 내용이 모두 이해되고 모순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안다고 할 수 없었다. 내가 경험한 것들이 실제로 그들이 말하는 내용인지 진실로 그와 같은 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들과 체험한 모든 것들 그리고 체험할 모든 것들을 다 연결해보아도 진실로 내가 얻었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사람이 말하는 진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다이다. 그렇기에 나는 진리라는 것을 그저 정하는 무엇이라고 결정 내렸고, 스스로의 진리를 정하기로 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알 수 없으니 스스로 진리라고 여기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를 세우고 그것에 따라서 살아가고자 했다. 이게 내가 그와 닮았다고 여긴 점이다. 그는 모른다 했지만 난 모르기에 내가 정하고자 했다. 개인적인 감상은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앎을 조금 풀어보자면 사람의 앎은 사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부분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상의 진리라는 것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은 앎으로 알 수가 없다. 죽음을 예로 들자면 사람들은 죽음을 알고 종교나 사상 등 앎을 만든 게 아니다. 실제로는 그것이 주는 본능이나 영감 등에서 시작을 했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앎이 그 근저에 위치한 앎을 알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그 본능과 영감을 느끼지 못한다. 실제로 느낀다 할지라도 그것이 같은 강물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를 주장하는 앎조차 그 시작은 이성과 지혜가 아니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진실되게 전지전능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모른다. 그게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소크라테스 적인 앎이다. 소크라테스는 그저 그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누구도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해서 사람의 존경을 받았고 사람의 미움을 얻었다. 그는 그런 검토하는 삶을 살았기에 결국 그렇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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