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알면, 이미 그것은 추한것이다.
모두 선함을 선하다고 알면, 이미 그것은 불선한 것이다.
이 현상계에 불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정확히는 발견된 적이 없다.) 모든것은 결국 변화하며 현상이 된다. 이는 세상과 인간의 한계이다. 이 세상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건 불완전하며 꾸준히 변화한다. 그렇기에 모두가 아름답다 하는 것은 이미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모두가 선하다하는 것은 이미 선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그저 변화한다. 그렇게 꾸준히 흐름에 맞춰 변하기에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추종할 수 있다. 모든게 변화는 곳에서 멈춰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변화와 같다.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고,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되고,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대며,소리와 음성은 서로 화합하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서로 반대되는 상태가 있으니 서로 있을 수 있다. 서로 비교 되니 차이가 있게된다. 서로 다르니 서로 변하며 따른다. 다른 것은 사실 다른것이 아니며 그저 같은 것의 다른 모습이다. 그저 편의에 의해서 구분할뿐이다.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말로 할 수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모든 것은 변하기에 그에 맞게 변하여야 그 본질을 유지 할 수 있다. 규정되고 멈춘 것은 결국 변하기 마련이니 선이 선이고자 한다면 꾸준히 선을 향해서 나아가야한다. 도가 도이고자 한다면 한순간의 규정이 아닌 영원한 도를 따라 맞추어 변하여야한다.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연히 반대되는 것으로 변화하니 변하지 않기 위해서 변해야한다. 그것이 이 현상계의 일이다.
그렇기에 성인은 그 껍데기가 아닌 본질에 따라 행하고, 말로 규정 할 수 없는 가르침을 따른다. 계율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 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의 본질이다.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저 손가락일뿐 거기에 달은 없다.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만물이 생겨나도록 돕되 그에 말하지 않고, 만물을 기르되 겉을 취하지 않으며, 만물이 작용하도록 돕되 그에 의지하지 않고, 공을 이루었더라도 그 공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도는 어디에도 있으며 어디에도 없다. 그 기묘함과 기오함은 아주 흔한 현상을 통해서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도의 본질이 아니다. 모든 것을 행하지만 그에 멈춰 있지 아니한다. 완전함이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니 선함이란 오직 너머의 유일함에만 존재한다. 그러니 어찌 이 불완전한 세상의 것들로 그를 형용하고 담아 낼까?
夫唯不居, 是以不去.
무릇 오직 머물지 않기에, 이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에 따라 변하는걸 멈추지 않으니 도리어 그에서 변하지 아니한다.
진리란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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